「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이 시대 젊은이에게 건네는 말
250년 전의 편지 소설이 지금 읽히는 이유. 베르테르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감정 하나를 세계의 전부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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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가 20대 중반에 쓴 이 소설은 1774년에 나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젊은 베르테르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다가 끝내 스스로 무너진다. 소설의 대부분이 베르테르가 쓴 편지라서, 독자는 거의 끝까지 그의 머릿속에 갇혀 있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두고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연애 소설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법'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놀랄 만큼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감정 하나가 세계의 전부가 될 때
베르테르의 비극은 로테를 얻지 못한 데 있지 않다. 그는 한 가지 감정을 삶 전체의 크기로 키웠다. 일도, 친구도, 자연도 처음에는 그를 기쁘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로테라는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점이 막히자 세계 전체가 막힌 것처럼 느낀다.
최적화를 공부하는 사람의 눈에는 이것이 익숙한 함정으로 보인다. 가까운 골짜기에 빠져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 믿는 것. 한 걸음 밖에서 보면 다른 길이 여럿 있는데,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겪는 감정이 아무리 커도, 그것은 내 삶의 한 구간이지 전체가 아니다.
취업, 시험, 관계에서 겪은 한 번의 실패를 "나는 끝났다"로 번역해 버리는 마음은 베르테르의 그것과 닮아 있다.
편지만 쓰고 답장은 읽지 않는 사람
이 소설에는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는 가득하지만, 빌헬름의 답장은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형식이 곧 주제다. 베르테르는 말하지만 듣지 않는다. 친구는 계속 충고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는 책에 한 줄도 남지 않는다.
자기 감정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내보내되, 돌아오는 말에는 귀를 닫는 모습. 내 타임라인에는 내 이야기만 흐르고, 나와 비슷한 목소리만 되돌아오는 환경과 닮아 있다. 250년 전의 편지 소설이 오늘의 소셜미디어를 예고한 셈이다.
알베르트를 다시 본다
처음 읽을 때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는 밋밋한 속물처럼 보인다. 찬찬히 보면 그는 감정과 생활 사이의 균형을 아는 어른이다. 성실하고, 약속을 지키고, 베르테르에게도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다. 괴테 자신도 베르테르처럼 살지 않았다. 그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여든이 넘도록 일하고 사랑하고 연구했다. 작가는 자기 안의 베르테르를 글로 써서 떠나보낸 것이다.
격렬한 감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삶을 무너뜨리는 데 쓰지 말고, 무언가를 만드는 데 쓰라는 것. 괴테가 몸소 보여 준 답이다.
이 시대 젊은이에게
정리하면 이 책이 건네는 말은 세 가지다.
- 감정은 사실이지만, 감정이 내린 결론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괴롭다"는 진짜다. "그러니 끝이다"는 검증되지 않은 추론이다.
- 답장을 읽어라. 내 편지를 받아 주는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만으로도 골짜기 밖이 보이기 시작한다.
- 쓰되, 떠나보내라. 기록은 감정을 키우는 데가 아니라 내려놓는 데 써야 한다.
이 소설이 출간된 뒤 주인공을 따라 하는 비극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고, 훗날 사회학에서는 그런 현상에 '베르테르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은 베르테르에게 공감하되 동의하지는 않는 거리에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속 인물에게는 그 거리를 둘 친구의 목소리가 지워져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혹시 지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안고 있다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24시간)에 전화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그리고 학교 상담센터에 말을 거는 것도 좋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