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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위의 터미네이터, 그 뒤엔 사람이 있었다

인간 대 휴머노이드 격투 경기의 로봇은 원격조종이었다. 속임수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조종한 기록으로 로봇을 가르치는 것은 지금 로봇 산업의 표준 전략이다. 문제는 조종이 아니라 공개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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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생성한 이미지

샌프란시스코의 한 로봇 격투 스타트업이 실제 링에서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격투 경기를 열었다. 180cm의 '터미네이터'를 닮은 로봇이 발차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면서 경기는 금세 끝났다. 곧 두 가지 논란이 뒤따랐다. 사람이 일부러 져 준 것 아니냐는 승부 조작 의혹, 그리고 안전 규정도 없이 경기를 치렀다는 비판이다. 개발사의 해명은 더 흥미로웠다. 로봇은 스스로 싸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컨트롤러와 VR 장비로 원격조종했다는 것이다.

출처: KBS News 〈잇슈 SNS〉, 2026년 9월 23일

원격조종은 속임수가 아니라 전략이다

"결국 사람이 한 거네"라며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로봇 산업에서 원격조종은 예외가 아니라 표준 공정이다. 사람이 로봇을 조종하는 시간이 그대로 학습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로 사람 없이 일하는 로봇을 만든다. 텍스트 AI가 인터넷의 글로 배웠다면, 로봇은 사람의 손놀림으로 배워야 한다. 몸을 쓰는 일의 데이터는 어디에도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Prosus, "Is Tesla Optimus Really Autonomous?" (2026). 로봇 전시장에서 사람이 개입하는 장면을 두고 "그 인계 과정이 로봇이 자율성을 배우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일하면서 데이터를 모으는 회사들

일본 편의점의 진열 로봇 (Telexistence). 도쿄의 FamilyMart·Lawson 300여 개 매장에서 로봇이 음료를 채운다. 로봇이 막히면 필리핀 마닐라의 조종사 약 60명이 VR로 접속해 대신 처리한다. 개입이 필요한 경우는 전체의 약 4%라고 한다. 이렇게 쌓인 원격조종 데이터는 미국 스타트업 Physical Intelligence의 로봇 AI 모델 개발에 제공되고 있다.

출처: Telexistence Inc. 공식 채널 (2022). 필리핀 원격조종 인력과 데이터 제공에 관한 내용은 Rest of World 보도(2025)를 참고했다.

가정용 휴머노이드 NEO (1X). 2만 달러짜리 가정용 로봇이다. 로봇이 아직 못 하는 집안일은 사용자가 앱으로 요청하면 원격 조종자가 대신 해 준다. 회사는 이 조종 세션을 자율화 학습에 쓴다. 원격조종을 숨기지 않고 아예 제품 기능('Expert Mode')으로 판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신 낯선 사람이 카메라로 내 집 안을 본다는 사생활 문제를 떠안는다.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I Tried the First Humanoid Home Robot. It Got Weird." (2025)

테슬라의 옵티머스도 시연 속 동작 상당수가 원격조종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현재 목적이 생산보다 학습 데이터 수집이라는 보도도 있으나, 회사가 공식 자료로 밝힌 내용은 아니어서 여기서는 참고로만 적는다.

내가 읽은 것

하나, 신뢰는 기술이 아니라 공개 시점에서 갈린다. 같은 원격조종이라도 먼저 밝힌 1X는 '사람이 돕는 로봇'이라는 상품이 됐고, 나중에 해명한 격투 경기는 '조작 논란'이 됐다. 스포츠 비즈니스의 핵심 자산은 결과의 공정성이다. 사람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숨기면 그 비용은 결국 신뢰로 치른다.

둘, 자동화는 0과 1 사이의 스펙트럼이다. Telexistence의 4%가 핵심이다. 96%는 기계가 하고, 예외만 사람이 처리한다. 생산관리에서 말하는 예외 관리(exception handling) 그대로다. 처음부터 완전 자동화를 노리기보다, 예외를 사람에게 넘기면서 그 예외를 데이터로 바꿔 비율을 줄여 가는 쪽이 현실적인 경로다.

셋, 조종사는 자기 자리를 없앨 AI를 가르치고 있다. 마닐라의 조종사들이 받는 월급은 250~315달러 수준이라고 한다. 원격조종은 몸을 쓰는 노동도 해외로 옮길 수 있게 만들었고, 그 노동의 기록이 다시 그 노동을 대체한다. 효율로만 보면 훌륭한 설계지만, 누가 그 데이터의 가치를 가져가는지는 따로 물어야 할 질문이다.

맺으며

링 위의 로봇 뒤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다. 지금의 로봇은 대부분 그렇게 배우고 있다. 기업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우리 AI 뒤에는 누가 있는가, 그리고 그 사실을 고객에게 말하고 있는가.


참고 자료